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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도밍고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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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도밍고 페론은 1895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군 경력을 쌓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1943년 군사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맡아 에바 페론과 만나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사회 정의와 자립 경제를 추구했다. 그는 노동자 권익 신장, 산업화, 사회 복지 확대를 추진했지만, 언론 탄압과 반대 세력 탄압으로 비판받았다. 1955년 쿠데타로 실각하여 망명했다가 1973년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도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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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도밍고 페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1948년
이름후안 페론
출생일1895년 10월 8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로보스
사망일1974년 7월 1일
사망지올리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안장 장소Museo Quinta 17 de Octubre, 산비센테,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배우자아우렐리아 티손 (1929년 1월 5일 – 1938년 9월 10일, 사별)
에바 두아르테 (1945년 10월 22일 – 1952년 7월 26일, 사별)
이사벨 마르티네스 카르타스 (1961년 11월 15일)
파트너넬리 리바스 (1953년~1955년, 추정)
정당노동당 (1945년–1947년)
정의당 (1947년부터)
서명
군 복무
소속아르헨티나 육군
복무 기간1913년–1955년
1973년–1974년
계급중장
지휘아르헨티나 육군 (1946년–1955년; 1973년–1974년)
전투1943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1955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대통령 (첫 번째 임기)
직위아르헨티나 대통령
순서29대
임기 시작1946년 6월 4일
임기 종료1955년 9월 21일
부통령오르텐시오 키하노
알베르토 테이사ire
전임에델미로 훌리안 파렐
후임에두아르도 로나르디
대통령 (두 번째 임기)
직위아르헨티나 대통령
순서40대
임기 시작1973년 10월 12일
임기 종료1974년 7월 1일
부통령이사벨 페론
전임라울 라스티리(임시)
후임이사벨 페론
부통령
직위아르헨티나 부통령
순서21대
임기 시작1944년 7월 8일
임기 종료1945년 10월 10일
대통령에델미로 훌리안 파렐
전임에델미로 훌리안 파렐
후임후안 피스타리니
정의당 대표
직위정의당 대표
임기 시작1946년 11월 21일
임기 종료1974년 7월 1일
전임당 설립
후임이사벨 페론
육군 장관
직위국방부 장관
대통령페드로 파블로 라미레스
에델미로 훌리안 파렐
임기 시작1944년 2월 24일
임기 종료1945년 10월 10일
전임페드로 파블로 라미레스
후임에두아르도 아발로스
노동 사회 복지 장관
직위노동 사회 복지 장관
대통령페드로 파블로 라미레스
에델미로 훌리안 파렐
임기 시작1943년 12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10월 10일
전임직위 설립
후임도밍고 메르칸테

2. 어린 시절

페론이 태어난 로보스의 집 안뜰.


후안 도밍고 페론은 1895년 10월 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로보스에서 태어났다.[11][206] 일부 기록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남부 로케 페레스의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213] 그의 아버지는 마리오 토마스 페론(Mario Tomás Perón)이고, 어머니는 후아나 소사 톨레도(Juana Sosa Toledo)이다.[11][213]

페론 가문은 원래 스페인 출신으로, 스페인령 사르데냐에 정착했다가 증조부가 1830년대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11] 페론은 훗날 자신의 사르데냐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22] 또한 스페인,[12] 영국, 프랑스계 혈통도 가지고 있었다.[13] 그의 증조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공한 구두 장수였고, 할아버지는 부유한 의사였으나, 1889년 할아버지의 사망 후 가세가 기울었다.[14] 아버지 마리오 토마스 페론은 유복한 가정 출신의 의학도였으나, 결핵 치료를 위해 시골 마을 로케 페레스로 요양을 갔다.[213]

그곳에서 아버지는 떼우엘체족 원주민 혈통인 후아나 소사 톨레도를 만나 페론을 낳고 동거했다.[213][206]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가 원주민을 차별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본가는 이 사실과 페론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213] 페론의 부모는 혼외로 두 아들을 낳았고, 1901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14] 이 때문에 페론은 사생아로 여겨지기도 한다.[206]

페론의 아버지는 1901년경 파타고니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양 목장을 운영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92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망했다.[14] 페론은 1904년(8세 또는 9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외할머니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보내져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14][206] 9세 무렵에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213]

1911년, 16세의 나이로 국립군사학교에 입학하여[213][22] 1913년에 졸업했다. 그는 학업 성적보다는 권투펜싱과 같은 운동 분야에서 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22]

3. 군 경력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아르헨티나 육군 장교로 복무하여 육군 대령까지 진급했다. 1913년 12월 졸업 후 제12보병사단에 소위로 배속되었고,[14] 엔트레리오스주 파라나의 보병 부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부대 지휘관이 되었고, 1920년에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라 포레탈'의 장기간 노동 갈등 중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4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육군대학교에서 군사사를 연구하며 군 내 군사사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1929년 1월 5일, 아우렐리아 티손(애칭 '포토타')과 결혼했다.[14] 같은 해 육군 총참모부에 임명되었고, 1930년에는 육군학교 군사사 교수가 되었다. 그는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군사 이론과 역사를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에는 독일군총력전 사상, 특히 국가 산업화와 국민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페론은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 장군의 지지자들로부터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에 대한 군사 쿠데타 계획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페론은 아구스틴 후스토 장군을 지지했지만, 1930년 9월 우리부루의 쿠데타에 가담했다. 쿠데타 성공 후, 그는 아르헨티나 북서부 외딴 지역으로 잠시 좌천되었으나 이듬해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고등전쟁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군사 역사를 가르쳤고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14]

페론(왼쪽)과 호세 우리부루 장군(중앙). 페론은 1930년 우익 쿠데타에 가담했으나, 보다 온건한 아구스틴 후스토 장군을 지지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칠레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다.[14] 이 기간 중인 1938년 9월 10일, 첫 부인 아우렐리아 티손이 자궁암으로 3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4]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아르헨티나 전쟁부의 지시로 이탈리아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알프스에서 산악전을 연구했고, 토리노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수학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 알바니아 등 유럽 여러 국가에서 군사 참관관 및 무관으로 활동하며[14][15]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즘나치 독일의 체제를 연구했다. 그의 저서 "Apuntes de historia militar" (''군사 역사에 대한 메모'', 1932년 초판, 1934년 2판[16])에서는 사회 민주주의가 자유 민주주의(그가 위장된 금권 정치로 보았던)나 전체주의 정권(그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했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14]

1941년 아르헨티나로 귀국하여 멘도사주에서 육군 스키 강사로 근무했다.[22] 귀국 후, 추축국 지지파 군인들과 함께 Grupo de Oficiales Unidos|그루포 데 오피시알레스 우니도스es(GOU, 통일장교단)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43년 5월에는 육군 차관에 임명되었다.

4. 194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부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보수 성향의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 정부가 전복되었다. 이 쿠데타는 아르투로 라우손 장군이 주도했으며, 카스티요 정부는 1937년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이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부정적인 선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7][18] 당시 육군 대령이었던 후안 도밍고 페론은 GOU(통합 장교단, 비밀결사)의 일원으로서 이 쿠데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14]

1940년의 페론


쿠데타 이후 페론은 처음에는 페드로 라미레스 장군 정부 아래에서 에델미로 파렐 장군(전쟁장관)의 보좌관을 맡았으나, 곧 당시에는 중요도가 낮았던 노동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페론은 노동부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 개혁을 적극 추진했으며,[19] 이를 통해 CGT 내 사회주의 및 노조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군정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빠르게 키워나갔다.[20] 그는 CGT-Nº1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안헬 볼렌기, 후안 아틸리오 브라무글리아 등)과 협력하여 노동법 제정, 노조 강화 등을 추진했고, 1943년 11월에는 노동부를 내각 수준의 기관으로 격상시켰다.[21] 페론은 노동부 장관직을 수행하며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긴밀히 했고, 이들을 자신의 핵심적인 정치적 지지 기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215]

1944년 파괴적인 산후안 지진 발생 후, 페론은 구호 기금 모금 활동을 주도하며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22] 같은 해 라미레스 대통령이 추축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군부는 그를 에델미로 파렐 장군으로 교체했고, 페론은 부통령 겸 전쟁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노동부 장관직도 계속 유지했다. 그는 노동부 장관으로서 아르헨티나 최초의 전국적 사회 보험 시스템인 INPS를 설립하고, 노동조합에 유리하게 산업 분쟁을 해결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광범위한 사회 복지 혜택을 도입했다.[23] 고용주에게는 근로 조건 개선, 퇴직금 및 산업재해 보상 제공 의무가 부과되었고, 해고 조건 제한, 노동 재판소 설립, 노동 시간 단축, 유급 휴가 일반화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농촌 근로자를 위한 최저 임금, 최대 근무 시간, 휴가 등을 보장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농촌 임대료 동결, 임금 인상 등을 주도했다. 1945년에는 연말 보너스인 "aguinaldoes" 제도를 도입하고, 임금 및 물가 등을 관리하는 국가 보상 연구소를 설립하여 이후 임금 인상의 기반을 마련했다.[24] 이러한 친노동 정책은 페론의 대중적 지지를 크게 높였고, 그를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상시켰다.[25]

1945년 4월 에델미로 파렐 대통령 (왼쪽)과 그의 후원자이자 부통령 겸 대령인 후안 페론


페론의 노동 정책은 노동자 보호와 권익 향상에 크게 기여하여 “사회당이 수십 년 걸려 이룬 것 이상의 성과”[207]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주도의 노사 협조 체제에 반대하는 자주적인 노동조합, 특히 공산당 계열의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등, 보호와 통제를 동시에 추구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의 성격을 지녔다. 페론의 영향력 확대는 군부 내 보수 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1945년 10월 그는 모든 직위에서 강제로 사임당하고 체포되었다. 하지만 CGT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시위(훗날 충성의 날로 기념됨)가 일어나 페론은 곧 석방되었다.[22]
1945년 10월 17일 페론 석방을 위한 시위

4. 1. 에바 두아르테와의 만남

에바 두아르테와 함께한 후안 페론


1944년, 아르헨티나 산후안 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여 6,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육군 대령이자 군사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은 이 지진 참사의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 모금 행사에서 배우 에바 두아르테를 처음 만났다. 페론은 그해 에델미로 파레이 정권에서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첫 번째 부인을 사별하고 혼자 지내던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의 젊음과 매력에 빠져들었고,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기 시작했다. 페론은 기금 모금 활동을 통해 하층민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고, 부통령으로서 군부와 대중 양쪽의 지지를 얻어 나갔다. 후안 페론과 에바 두아르테는 1945년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다음 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군부 내 다른 세력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페론의 야심과 대중을 사로잡는 능력에 위협을 느꼈고, 페론에 대한 미국 대사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출신인 에바와의 공개적인 관계 역시 군부에게는 불편하게 여겨졌다. 결국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 전복 혐의로 페론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그를 체포했다.[216] 이에 반발하여 페론 석방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1945년 9월 17일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217] 마침내 1945년 10월 17일, 페론은 석방되었다.

5. 1945년 아르헨티나의 격동기

1945년은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르헨티나는 추축국에 우호적인 중립국 노선을 유지했으나,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국제적 압력, 특히 미국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1944년 1월 26일, 아르헨티나 정부는 독일일본 제국과의 국교를 단절했는데, 이는 당시 외교 관계를 담당하던 페론의 선택으로 알려졌으며, 연합국 측에 합류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해석되었다. 이 조치는 아르헨티나 내부에서도 논란을 일으켰으나, 정부는 친나치 성향의 출판물을 폐쇄하고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는 등 이미지 개선을 시도했다. 국교 단절은 결국 라미레스 대통령의 실각으로 이어졌고, 1944년 페론의 친구인 에델미로 후안 파렐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페론은 육군 장관 겸 부통령에 올라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36] --

실권을 잡은 페론은 여전히 친추축국 성향을 보였고, 이에 미국은 대사 소환, 경제 제재 등 강경한 반페론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외압은 오히려 외부의 간섭에 저항하는 국가 주권의 수호자로서 페론의 국내 이미지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기부터 페론의 사상은 페로니스모(페론주의)로, 그의 지지자들은 "페로니스타"(페론주의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연합국 측에 합류하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945년 1월 4일, 내무부 장관 테세르 제독은 공산당의 합법화를 발표했고, 친나치 성향의 신문인 카빌도와 엘 팜페로는 발행이 금지되었다. 또한 대학의 자율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기존 감사들을 해임하고 해고되었던 교수들을 복직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2월에는 페론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하여 선전포고, 봉쇄 해제, 아르헨티나 정부 승인 및 차풀테펙 미주회의 가입 문제 등을 논의하려 했다. 마침내 1945년 3월 27일,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함께 독일과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일주일 후에는 차풀테펙 법에 서명하여 유엔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고, 1945년 유엔 창립 51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면서 미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미국은 더 이상 아르헨티나의 전략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새로 부임한 주 아르헨티나 미국 대사 스프루일 브레이든은 공공연하게 페론을 비난하며 아르헨티나 내정에 개입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갈등은 1945년 10월 17일, 미국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20] 에두아르도 아발로스 장군 주도의 군사 쿠데타로 이어졌다. 페론은 이 쿠데타로 인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마르틴 가르시아 섬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페론의 구금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페론을 지지하는 군부 내 세력과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특히 노동총연맹(CGT)은 페론 지지를 결의하며 총파업을 선언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페론의 연인이자 후일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배우 에바 페론(에비타)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페론의 석방을 열정적으로 호소하며 대중의 지지를 결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와 군부 내 친페론 세력의 압력에 굴복한 쿠데타 세력은 결국 며칠 만에 페론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페론이 노동자 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으며, 이후 그의 본격적인 정치적 부상의 발판이 되었다.

6. 첫 번째 대통령 집권 (1946-1952)

1946년, 페론은 오르텐시오 키하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노동자 밀집 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전통적인 농업 지배 세력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기대했던 중산층의 지지까지 얻어 54%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218] 페론은 집권 기간 동안 사회 정의 실현과 경제 자립을 동시에 추구하며, 냉전 시대 미국소련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길을 표방했다.

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한 페론은 이전 정권들보다 노동 계급의 이해를 더 중시했으며, 전통적인 지배 계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19] 그는 강력한 전국 단위 노동조합인 CGT 설립을 지원하여 노동 세력의 조직화를 이끌었다. 경제적으로는 1947년 7월까지 모든 외채를 상환하고, 산업화 추진과 주요 사회 기반 시설의 국유화를 통해 경제 자립을 도모했다. 또한 집권 기간 동안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확충하여 수많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복지 증진에 힘썼다.[220]

페론의 5개년 계획 덕분에 아르헨티나 경제는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짧은 호황을 누렸다. 이 기간 동안 GDP는 4분의 1 이상 증가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축적된 17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국유화와 공공 및 민간 투자에 활용한 결과였다. 특히 민간 부문의 산업 투자가 크게 늘었다.[38]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업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자본재 수입이 급증하면서 1948년에는 무역 흑자가 사라졌다.[39] 여기에 더해 영국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르헨티나에 진 농산물 대금 부채(약 6.5억달러) 상환 문제와 미국과의 정치적 마찰 및 미국 농업 로비의 압력으로 인한 수출 감소는 아르헨티나의 외환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수출하여 얻은 파운드화를 달러로 전환하는 조항을 중단시켰고, 페론은 1948년 3월 부채 대신 24000km가 넘는 영국 소유 철도망을 인수했다.[38][40]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과 국내외 민간 화물선을 국유화하고 선박을 추가 매입하여 국가 상선 규모를 3배로 늘렸으며, 엔세나다에 리오 산티아고 조선소를 열었다.[40][41]

철도 국유화 법안에 서명하는 페론(1948년)


1949년부터 수출은 급감했고(1952년 가뭄으로 더욱 악화), 교역조건 악화와 맞물려 페소 가치는 1948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약 70%나 폭락했다.[39]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1951년 말 50%[43])과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자 페론 정부는 민간 은행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으로부터 1.25억달러를 빌려야 했다.[42] 1952년 노동자의 실질 구매력은 1948년 최고치보다 20% 감소했고, GDP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성장을 멈췄다.[38] 다만, 1952년 이후 임금은 다시 실질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페론은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949년 광범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새 헌법은 사회 개혁을 명시하고 천연자원과 공공 서비스의 국유화를 보장했으며, 대통령의 재선을 허용했다.[44]

페론의 집권기는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독재 정치를 펼치며 반대파를 탄압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일부에서는 그를 “좌익 파시스트”로 평가하기도 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페로니스타”로 불렸다. 그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자국 산업 육성과 외국 자본 배제를 추진했으며, 이는 파시즘과의 유사성으로 논란이 되기도 한다. 또한 포퓰리즘적 경향도 강하게 보였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유대인 박해에는 반대했지만, 전쟁 후 이탈리아 극우 인사 리치오 젤리 등의 도움을 받아 나치 친위대 전범들을 다수 아르헨티나로 도피시켜 군과 치안 기관에서 활동하게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는 독일의 기술과 조직 운영 노하우를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51년 말 총선거에서 페론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논란은 계속되었다. 1952년 7월,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부인 에바 페론이 암으로 사망하면서 페론의 정치적 입지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6. 1. 제1차 페론 정부의 정책

1946년, 페론은 오르텐시오 키하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노동자 밀집 지역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5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기존의 농업 중심 지배 세력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기대했던 중산층 세력도 페론을 지지했다.[218] 페론 정부는 사회 정의 실현과 경제 자립을 동시에 추구하며, 냉전 시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표방했다.

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집권한 페론은 이전의 파시즘 정권보다 노동 계급의 이해를 더 중시했으며, 전통적인 지배 계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19] 그는 강력한 전국 단위 노동조합인 CGT 설립을 지원하여 노동 세력의 조직화를 이끌었다. 경제적으로는 1947년 7월까지 모든 외채를 상환하고, 산업화 추진과 주요 사회 기반 시설의 국유화를 통해 경제 자립을 도모했다. 또한, 집권 기간 동안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확충하여 병원 약 4,000개와 학교 약 8,000개를 새로 설립하는 등 복지 증진에 힘썼다.[220]

페론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사회 기반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각기 다른 궤간으로 건설되어 비효율적이던 철도 시스템을 현대화하기 위해 1억달러 이상을 투자했으며, 여러 소규모 지역 항공사들을 국유화하여 1950년 아에롤리네아스 아르헨티나스로 통합했다. 이 신생 국영 항공사는 36대의 새로운 DC-3DC-4 항공기를 도입했으며, 새로운 미니스트로 피스타리니 국제공항 건설과 이 공항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연결하는 22km 길이의 고속도로 건설로 뒷받침되었다. 이후 로사리오산타페를 잇는 고속도로도 건설되었다.[44]

산라파엘 근처 발레 그란데 수력발전 댐 저수지


로사리오 근처 병원, 페론 시대에 건설된 수백 개의 병원 중 하나


에너지 부문에서는 부족한 전력망 확충에 나섰으나, 집권 기간 동안 전력망 규모는 25%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수력 발전 용량은 첫 임기 동안 45MW에서 350MW로 크게 늘어나 전체 공공 전력 생산량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페론은 에너지 자원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아르헨티나 유일의 활성 탄광인 리오 투르비오 탄광 개발을 시작했으며, 국영 석유 회사 YPF가 태워버리던 천연가스를 포집하여 활용하기 위해 국영 가스 회사인 ''가스 델 에스타도''를 설립했다. 1949년 코모도로 리바다비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잇는 1700km 길이의 가스관 완공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 가스관 건설로 천연가스 생산량은 하루 30만 ㎥에서 1,500만 ㎥로 급증하여 천연가스 자급자족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가스관이었다.[44]

국영 에너지 회사 YPF의 생산량이 80% 증가하면서 페론 집권 기간 동안 석유 생산량은 연간 330만 ㎥에서 480만 ㎥ 이상으로 늘어났다.[45] 그러나 제조업체 대부분이 자체 발전기를 사용하고 자동차 수가 3분의 1이나 증가하면서[46] 석유 소비량 역시 크게 늘어, 석유 수입 의존도는 40%에서 50%로 오히려 증가했다.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연간 3억달러 이상의 부담을 안게 되었는데, 이는 전체 수입 비용의 5분의 1이 넘는 금액이었다.[47]

페론 정부는 사회 부문에 대한 전례 없는 투자로도 평가받는다. 내각에 보건부를 신설하고 초대 장관으로 신경과 의사인 라몬 카리요를 임명하여 4,200개 이상의 병원 및 보건 시설 건설을 추진했다.[48] 이와 함께 1,000개 이상의 유치원과 8,000개 이상의 학교(수백 개의 기술학교, 간호학교, 교원 양성학교 포함)를 건설하는 등 교육 인프라 확충에도 힘썼다.[49] 새로 임명된 공공사업부 장관 후안 피스타리니 장군은 65만 채의 공공 부문 주택 건설과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미니스트로 피스타리니 국제공항 건설을 감독했다.[50] 또한, 활동이 부진했던 국가 모기지 은행을 재활성화하여 민간 부문의 주택 건설을 촉진했다. 그 결과 인구 1,000명당 연평균 8채 이상의 주택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자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주택 건설률 중 하나였다.[38]

1950년 국영 군수 시설 생산 라인; 1927년부터 운영되어 페론의 예산으로 현대화 및 확장되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 군, 특히 공군의 현대화에도 힘썼다. 1947년부터 1950년 사이에 아르헨티나는 풀키 I와 풀키 II라는 두 종류의 제트 전투기를 자체 개발했다. 풀키 I은 아르헨티나 기술진과 프랑스에서 부역 혐의로 기소된 에밀 드와투앵이 설계했고, 풀키 II는 나치 독일 출신의 항공기 설계자 쿠르트 탱크가 설계했다. 풀키 II는 시험 비행에서 1000km/h의 속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개발 과정에서 조종사 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결국 1959년까지 시험만 계속되다 실용화되지는 못했다.[51] 하지만 풀키 프로젝트의 경험은 이후 IA 58 푸카라와 IA 63 팜파와 같은 아르헨티나 국산 항공기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다.[52]

한편, 페론은 1951년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 로널드 리히터가 주도하는 우에물 프로젝트를 통해 아르헨티나가 세계 최초로 핵융합 발전에 성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리히터는 쿠르트 탱크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탱크는 리히터가 개발할 핵융합 에너지로 항공기 동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페론은 핵융합 에너지가 우유병 크기의 용기에 담겨 공급될 것이라고 대중에게 선전했다. 리히터는 1951년 성공을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듬해 페론이 임명한 조사단(호세 안토니오 발세이로, 마리오 반코라 등)은 이 프로젝트가 사기임을 밝혀냈다. 이후 우에물 프로젝트는 해체되고 관련 시설과 인력은 새로 설립된 국립 원자력 위원회(CNEA) 산하의 아토미코 바릴로체 센터(CAB)와 쿠요 국립대학교 물리학 연구소(훗날 발세이로 연구소(IB)로 명명됨)로 이관되었다.[20] 히스토리 채널의 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비밀주의, 나치 관련 인사들의 연루, 기밀 해제된 미국 정보 문서 등을 근거로 우에물 프로젝트의 실제 목표가 핵융합 발전이 아닌 원자폭탄 개발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955년 아르헨티나 해군이 해당 시설의 일부 건물을 폭격한 사건은 합법적인 연구 시설을 폐쇄하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6. 2. 외교 정책

그는 집권 시기 동안 사회정의와 자립경제를 동시에 추구했으며, 이 두 가지 목표를 내세우면서 공산주의자본주의 간의 냉전 참여를 거부했다.

6. 3. 에바 페론의 영향력

페론 정권 하에서 영부인 에바 페론은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페론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노동 운동에 대한 통제는 중요했으며, 이 과정에서도 에바 페론의 입김이 작용했다. 1946년 CGT 사무총장 선거에서 전화 노동조합 지도자인 루이스 게이가 페론의 후보였던 전 소매 노동자 지도자 안헬 보를렝기 (페론의 유명한 10월 17일 복귀에서 중심 인물)를 꺾고 당선되었으나, 페론은 3개월 후 루이스 게이를 CGT에서 축출했다. 그 자리에는 영부인 에바 페론과 가까웠던 무명의 조합원 호세 에스페호가 임명되었다.

페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수년 동안 투옥된 노조 지도자 시프리아노 레이예스


페론 정권은 노동 운동 내 반대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정육업 노조 지도자인 시프리아노 레예스는 1947년 페론이 노동당을 페론주의당으로 대체하자 이에 반기를 들었다. 파업을 조직한 레이예스는 대통령과 영부인의 생명을 위협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타임지에 따르면, 이는 경찰이 불충실한 공군 중위를 가장하여 접근해 페론 전복 음모가 있는 것처럼 꾸며 레이예스의 지지를 유도한 함정 수사였다.[57] 레이예스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으며, 5년 후 가석방 제안을 거부했고 1955년 페론 정권이 무너진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58]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모스 메히아 종합병원에 수감된 수백 명의 페론 반대자 중 한 명이었는데, 이 병원 지하실은 경찰 구금 시설로 개조되어 고문이 자행되었다.[59]

언론 통제 역시 페론 정권의 주요 통치 수단이었으며, 이 과정에서도 에바 페론 측근의 역할이 있었다. 에바 페론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카를로스 알로에는 페론주의당이 지분을 인수한 에디토리얼 헤이네스에서 발행하는 여러 오락 잡지를 감독했다. 또한 언론 담당 장관 라울 아폴드를 통해 사회주의 성향의 ''라 방과르디아''나 보수 성향의 ''라 프렌사'', ''라 라손'' 같은 신문들이 폐간되거나 정권에 몰수되었다.[28] 언론에 대한 탄압은 점점 심해져 1943년에서 1946년 사이 110개의 출판물이 문을 닫았고, ''라 나시온''이나 로베르토 노블의 ''클라린'' 같은 다른 언론사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며 자체 검열을 강화했다.[60]

문화 및 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에바 페론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작용한 경우도 있었다. 코미디언 니니 마샬, 영화 제작자 루이스 사슬라프스키, 피아니스트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등 많은 예술가들이 투옥되거나 망명을 떠나야 했다. 특히 유명 여배우였던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에바 페론과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망명을 강요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61] 또한 출판인이자 비평가인 빅토리아 오캄포와 같은 지식인들도 투옥되었다. 페론 정권은 리카르도 발빈과 같은 반대파 정치인보다 비판적인 예술가나 지식인들에게 더 큰 위협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6. 4. 퇴진과 망명

1952년 에바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며 재선에 성공했으나, 같은 해 에바 페론이 사망한 후 추진했던 개혁들이 점차 실패로 돌아가면서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페론은 가톨릭 교회 및 군부와 갈등을 겪었는데, 특히 1955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은 가톨릭 신자와 군부의 지지를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55년 9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을 잃고 망명길에 올랐다.

1956년파나마로 망명한 페론은 그곳에서 이사벨 마르티네스를 만났고, 그녀의 젊음과 미모에 끌려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 1960년 페론은 망명지를 스페인으로 옮겼으며, 이사벨도 동행하여 이듬해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망명 기간 동안 페론은 좌익 페론주의 조직인 몬토네로스와 같은 여러 전투적인 좌익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지원하는 한편, 반공주의 성향의 극우 및 보수 세력도 지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경찰 간부 출신으로 반페론주의 조직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호세 로페스 레가는 페론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가장하여 페론 부부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221]

7. 두 번째 대통령 집권과 사망 (1973-1974)

1973년 3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페론의 개인비서 출신이자 페론주의 좌익 분파에 속하는 엑토르 캄포라가 승리했다. 후안 페론은 아내 이사벨 페론과 자신의 개인비서인 호세 로페스 레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6월 호세 로페스 레가에세이사 학살을 일으켜 좌우익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973년 7월 13일 엑토르 캄포라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임하고,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을 맡는 동안 호세 로페스 레가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AAA)을 결성하여 국가 주도로 좌익 페론주의 세력을 탄압했으며, 이로 인해 페론이 재집권할 무렵에는 좌우익 갈등과 정치 폭력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같은 해 10월 12일 라울 라스티리마저 사임하면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직은 공석이 되었다. 후안 페론은 아내 이사벨 데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 후안 페론이 대통령,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어 1973년 10월 12일 취임했다. 취임 직후,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 좌익 세력을 "국가 변란", "폭동"을 기도하는 세력으로 지칭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갈등은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후벤투드 페로니스타es) 소속 의원 8명이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령이었던 후안 페론은 건강 악화로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재취임한 지 약 1년 만인 1974년 7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10] 그의 사망 소식에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의 지지자가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는 인파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행렬을 이루었다.[210]

페론 사망 후, 부통령이었던 아내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아르헨티나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8. 페론의 손목 절단 사건

1987년 6월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차카리타 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페론의 묘가 훼손되었다. 누군가 묘지에 침입하여 페론 시신의 양 손목을 절단하고, 그의 칼을 포함한 일부 개인 소지품과 함께 훔쳐 달아났다.[198] 손목은 체인톱으로 잘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페론주의 의원들에게는 800만달러의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가 전달되었다.

이 기이한 사건의 범인과 범행 동기는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00]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 당시 아르헨티나의 민주화 과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 장교들이 라울 알폰신 대통령 정부를 위협할 목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222] 언론인 데이비드 콕스와 다미안 나봇이 공동 저술한 책 "두 번째 죽음"에서는 이 사건이 더티 워에 연루되었던 리시오 겔리 및 일부 군 장교들과 관련이 있으며, 페론의 영혼을 영원한 불안 상태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벌인 일종의 의식 행위였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199]

2006년 10월 17일, 페론의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산비센테에 위치한 그의 옛 여름 별장 부지에 새로 마련된 영묘로 이장되었다. 이장 행사 당일에는 참석 문제를 둘러싸고 페론주의 노동조합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일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경찰의 개입으로 상황이 진정되어 유해 이송 행렬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자신이 페론의 사생아라고 주장해 온 마르타 홀가도는 그의 유해에서 DNA 샘플을 채취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15년 동안 페론과의 친자 관계 증명을 위한 DNA 분석을 시도해왔으나, 2006년 11월에 나온 검사 결과 홀가도는 페론의 딸이 아님이 최종적으로 밝혀졌다.[201][202] 홀가도는 2007년 6월 7일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사망 직전까지 자신이 페론의 딸임을 증명하기 위한 법적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9. 반페론주의와 페론주의

194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 속에서 페론주의와 반페론주의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다수의 노동계급은 페론을 지지했고, 중산층과 상류층은 페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5년 7월 12일, 이전까지 페론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유보했던 노동조합들은 페론이 시행한 노동 정책을 옹호하며 Contra la reacción capitalista|꼰뜨라 라 레악시온 까삐딸리스따es("자본주의 반항에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는 노동조합이 페론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면, 반페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페론주의의 반민주적 태도를 비판하는 등, 두 세력 간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페론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자 계급 일부가 등을 돌리는 일도 발생했다. 1945년 10월 16일, 노동자들은 월급날임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보상이나 급여를 받지 못하자 불만을 표출했다. 계속되는 정치적 충돌 속에서 페론은 내각 각료들을 교체하고 다른 직책에 임명하는 등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으며, 암살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 연맹과 아르헨티나 대학 연맹 등 다양한 조직들이 페론에 반대하는 쿠데타 시도 및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페론의 이념과 정책을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해석하려는 시각은 페론의 망명과 사후에 특히 주목받았다. 많은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이 페론이 사회주의자였는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했는지를 분석했다.[110] 페론주의는 국민 사회주의,[111] 수혜적 사회주의,[112]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113] 그리고 가톨릭 사회주의[114] 등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페론이 산업 국유화와 사회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공공 부문을 창출했으며, 이는 재분배적 성격을 띠고 노동자의 이익과 노동조합의 권한 강화를 우선시했다고 지적한다.[115] 페론과 사회주의 지도자 후안 호세 아레발로와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볼리비아 국민혁명에 대한 그의 지지 역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116] 또한, 미국소련의 '제국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론은 쿠바 혁명,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17] 사미르 아민,[118] 호세 마리아 아리코,[119] 디터 보리스(Dieter Boris),[120] 그리고 도널드 C. 호지스[121] 와 같은 일부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은 페론의 이념을 진정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정치학자 피터 라니스에 따르면, 페론주의는 그 모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좌파와 사회주의 전통의 일부이다. 라니스는 페론주의를 사회주의로 간주하지 않는 견해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를 표명한 사람이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지지와 여러 사회, 경제,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한 좌파적 제안을 포함하는 포퓰리즘적 연합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대신 페로니즘을 좌파 전통에서 완전히 떼어놓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종종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입장과 일치합니다. 차이점은 페로니즘에서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경제적 집단과 영향력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페로니즘을 진보 좌파의 대중 운동 전통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저는 페로니즘과 아르헨티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이의 격차를 부정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지만, 페로니즘을 진정한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부정하는 것은 페론의 망명부터 현재까지 모든 부문에서 벌어진 좌파 간의 위대한 아르헨티나 논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은 '페로니스트 조국'이었습니다."[122]

비록 반페론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체 게바라는 페론주의를 "쿠바 혁명이 편을 들 수 있는 일종의 토착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로 간주했다.[123] 피델 카스트로 역시 그의 자서전 나의 삶: 구술 자서전에서 페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세기에 군인들이 행한 많은 영웅적인 혁명적 업적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도 군 출신이었습니다. (...) 페론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과두 정치 세력을 모욕하고, 그들을 굴욕시켰습니다 – 그는 그들의 극장과 부유층의 다른 상징들을 국유화했습니다 – 하지만 과두 정치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적절한 순간에 미국과의 공모와 지원을 받아 페론을 타도했습니다. 페론의 위대함은 그가 그 부유한 나라의 준비금과 자원을 이용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항상 그에게 감사하고 충성스러웠던 그 사회 계급은 페론을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124]

마오쩌둥 또한 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르헨티나의 친페론 마오이스트 민병대를 만났을 때, 마오는 "만약 내가 젊은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나는 페로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25] 아르헨티나 혁명 공산당은 이 발언을 활용하여 "마오가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그는 페로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선전했다.[126] 이에 페론은 "마르크스주의는 페론주의 운동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완한다"고 답했으며, 1972년 연설에서는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페론은 또한 자신이 중국인이었다면 마오이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공산주의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때는 "그 나라의 체제는 여러 면에서 후스티시아리즘과 유사하다"고 결론지었다.[127]

페론 자신은 자신의 이념을 후스티시아리즘(Justicialismo) 또는 '사회주의적 국민 기독교'/'기독교 국민 사회주의'로 다양하게 묘사했다. 이는 각 국가의 고유한 상황과 문화를 고려하면서 국민의 의지를 따르는 다양한 정부 시스템을 논의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128] 리처드 길레피에 따르면, 이 표현은 "특정 국가적 조건과 전통을 존중하는 경제 사회화와 대중 권력의 체제로 이해되는 사회주의의 '국가적' 길"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129] 페론은 "국민주의는 사회주의와 반드시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결국 두 가지 모두 적대적이기는커녕, 인민과 인간의 해방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연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72년, 후스티시아리즘은 "대중과 아르헨티나 노동 계급의 열망을 대표하고, 표현하고, 행동으로 발전시키는 한 사회주의의 국가적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좌파 페론주의 집단은 페론주의를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부여하는 토착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여겼다.[130] 1971년 7월, 페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후스티시아리스트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입니다… 우리의 혁명적 과정은 개인적 및 집단적 [필요]를 명료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후스티시아리즘이 원하는 것과 같은 공정한 사회주의, 그리고 그것이 후스티시아리즘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공동체가 [공동체의] 내재적 조건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주의입니다."[131]

페론은 자신의 "국민 사회주의"를 "외국 제국주의의 결정적 극복"과 "아르헨티나에서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경계"로 묘사했다. 그는 "때때로 매우 이상하게 들리는 그 단어, 국민 사회주의는 그 이상함을 잃고 자본의 억압을 근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미를 얻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페로니즘의 역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그가 이해한 페로니스트 국민 사회주의는 "사회를 인간의 봉사에, 인간을 사회의 봉사에 두는 것; 도덕적, 윤리적 가치, 정직과 겸손을 이 단계의 기본 축으로 구출하는 것;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고, 은행을 국유화하고, 심오한 문화 개혁을 수행하고, 심오한 농업 혁명을 통해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외국 무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페론주의의 국민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에 예속된 사람들"의 해방에 기초하고 페론이 관리하는 "국민 대표"를 통해 주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제국주의를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데 있어 자본주의의 한계"라는 더 심오한 문제의 일부로 보았다.[130]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회주의가 적어도 페론의 정치적 영감 중 하나였다고 본다. 페데리코 핀켈슈타인은 페론의 포퓰리즘을 "국민주의와 비마르크스주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종합"으로 분류했다.[132] 아르헨티나 역사가 크리스티안 부흐루커(Cristian Buchrucker)는 페론의 이념을 국민주의, 포퓰리즘 및 기독교 사회주의 요소의 혼합으로 보았고,[133] 움베르토 쿠체티는 페로니즘이 "국민 사회주의, 노조주의 전통, 중간 계층의 국유화, 카리스마적 지도력, 혁명적 예언, 제3세계주의, 후스티시아리스트 윤리, 기독교적 유토피아, 대중 동원 및 민주화의 윤곽"과 같은 정치적 개념의 집합체라고 말했다. 부흐루커는 페론의 운동이 내부의 경쟁적인 이념적 운동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상태에 있었지만, 노동조합과 "국가적 해방 운동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주장하는 혁명적 수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133] 예르지 J. 위아트는 페론이 "강한 국민주의적 색채를 띤 사회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사상의 결합"을 견지했다고 믿었다.[134] 에밀리오 오캄포(Emilio Ocampo)는 페론이 "항상 강한 국민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요소와 수사법을 통합했다"고 주장했다.[135]

정치학자 라파엘 디 텔라는 페로니즘을 정치적 가톨릭과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묘사했고,[136] 역사가 라아난 라인은 페로니즘을 가톨릭 사회 교리와 사회주의적 흐름에 의해 형성된 국민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분류했다.[137] 다른 학자들은 페로니즘을 국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본다. 피터 라니스는 페론이 "페로니즘을 통해 토착 사회주의와 아르헨티나 국민주의를 융합했다"고 썼으며,[138] 릴리 발로펫은 페론의 정책이 감마르 압델 나세르의 정책과 유사하며, 두 정권 모두 반제국주의적 국민주의, 냉전 시대 비동맹 철학,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특징으로 한다고 언급했다.[139] 게리 B. 매디슨은 페론의 정책이 포퓰리즘 사회주의를 나타낸다고 보았다.[140]

미국 역사가 개럿 존 로버츠는 페로니즘을 "극단적 국민주의 사회주의 노동 운동"으로 보고, 페론이 "사회주의적이고 국민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그의 5개년 계획이 요셉 스탈린 하의 소비에트 경제 프로그램 패턴을 따랐다고 지적했다.[141] 알베르토 스펙토로프스키(Alberto Spektorowski)는 페론이 자신의 이념을 '국민 사회주의'라고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결론지었다. 스펙토로프스키에게 페론은 "국가 전체주의, 반제국주의 및 사회 정의"를 종합했다. 그는 또한 페론이 좌파 국민주의와 신디칼리즘에 의해 형성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 "이념적 대립은 페로니즘에 의해 대표되는 국민주의와 구 보수 질서 사이에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운동을 형성했다고 언급했다.[142]

로날도 먼크에 따르면, "많은 관찰자들은 페론 자신을 일종의 국민주의적 사회주의 지도자, 아니면 아르헨티나의 레닌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페론과 페로니즘의 혁명적 날개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 먼크는 페론이 나중에 자신의 운동의 좌파와 갈등을 빚은 것이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정치에 더 기반을 두었다고 썼다. "몽토네로스의 순수하게 반제국주의적이고 반과두 정치적 프로그램("국민 사회주의")은 페론의 "국가 재건" 경제 프로젝트와 양립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대중 동원력은 그러했습니다."[143] 레스터 A. 소벨은 또한 페로니스트 좌파와의 최종 갈등과 관련하여 "페론은 사회주의에 반대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비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적대감으로 인해 발생한 그의 운동 내 분열에 더 반대했다"고 주장한다.[144]

그의 정치학 책 정치적 인간에서 시모어 마틴 립셋은 "페로니즘은 마르크스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주로 도시 노동자이지만 더 빈곤한 농촌 인구도 포함하는 더 가난한 계층을 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페로니즘을 "하층 계급에 호소하는 반자본주의적 포퓰리즘 국민주의"로 묘사했다. 립셋은 페로니즘을 파시즘의 좌익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페로니즘이 파시즘의 변형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좌익적 파시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그들의 좌절감을 해소할 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145] 그는 페로니즘을 "좌익 극단주의의 한 형태"로 분류했다.[146]

페론주의는 제3세계 사회주의의 한 형태,[147] 또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아랍 사회주의와 유사한 포퓰리즘적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독특한 아르헨티나식 형태로도 묘사되었다.[148] 독일 정치학자 리사 보게르츠는 페로니즘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더 광범위한 역사적 운동"으로 간주하며, 아르헨티나 사회당과 같은 아르헨티나의 주류 사회주의 운동과는 다른 운동을 나타냅니다.[149] 마찬가지로 도널드 C. 호지스는 페로니즘을 국민주의와 기독교 사회 교리의 요소를 크게 통합한 "특이한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묘사했습니다.[150] 페론에 대해 쓴 찰스 D. 아메링거는 "1943년 후안 페론의 집권은 아르헨티나의 사회주의적 충동의 끝이 아니었고, 정점이었다"고 주장하고, "페론이 도입하거나 시행한 많은 사회 입법은… 사회당에서 시작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151]

사후 40년 이상이 지난 현재에도, 페론의 지지 기반이었던 "페로니스타"는 아르헨티나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페로니스타"를 모체로 한 "페론당"(정식 명칭은 정의당)은 1989년 이후 카를로스 메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등 4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으며, 의회 내에서도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211]

10. 평가와 비판

일각에서는 페론주의포퓰리즘의 대표적 예로 들며,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시켰다고 주장한다.[223]

그러나 페론주의자들은 아르헨티나 경제 파탄의 실질적 책임은 후안 페론이 아니라,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와 그들이 도입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고 반박한다. 군사정부가 무분별하게 외자를 유치하고 집권에 협력한 다국적기업을 불러들였으나, 이들이 이익을 챙긴 후 빠져나가면서 막대한 외채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는 것이다.[224] 실제로 페론은 경제 개발보다는 빈부격차 해소에 중점을 두어, 국민소득의 급격한 증가는 없었지만 빈민율을 4%까지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페론 집권기의 산업화와 경제 성과를 재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 개인소득은 232% 증가했다. 페론은 산업 투자를 가장 많이 단행하여 아르헨티나가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집권 초반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했던 절대 빈곤층이 국가 소득의 33%를 분배받았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전례 없는 부의 재분배였으며 60%에 달하는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225]

이러한 관점에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본격적으로 파탄시킨 인물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로 지목된다. 비델라는 1978년 FIFA 월드컵 개최를 위해 과도한 재정을 투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불투명한 비용 지출이 많았다. 이 때문에 1978년 FIFA 월드컵 우승이 아르헨티나의 운명과 맞바꾼 대가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비델라의 폭정과 후임자인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무리하게 일으킨 포클랜드 전쟁의 여파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급격히 쇠퇴했고, 2001년에는 빈민율이 74%에 달하는 극빈국으로 전락했다.

한편, 페론은 1943년 쿠데타 참여와 재임 기간 중 언론 탄압 행위로 비판받는다. 페론주의에 남아있는 파시즘의 영향도 지적되는데, 아르헨티나 사회당 출신 학자 카를로스 파이트(Carlos Fayt)는 페론주의가 이탈리아 파시즘을 아르헨티나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페론의 견해와 정책을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페론의 망명과 사후에 이러한 분석이 활발해졌는데,[110] 페론주의는 국민 사회주의,[111] 수혜적 사회주의,[112]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113] 가톨릭 사회주의[114]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페론이 국유화된 산업과 사회 서비스 중심의 계획적이고 규제된 경제를 구축했으며, 이는 노동자의 이익과 노동조합 권한 강화를 우선시하는 재분배적 성격을 지녔다고 지적한다.[115] 사회주의 지도자 후안 호세 아레발로와의 긴밀한 관계 및 볼리비아 국민혁명에 대한 지지,[116]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표방하면서도 쿠바 혁명,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동맹을 맺은 점[117] 역시 근거로 제시된다. 사미르 아민,[118] 호세 마리아 아리코,[119] 디터 보리스(Dieter Boris),[120] 도널드 C. 호지스[121] 등 일부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은 페론의 이념을 진정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정치학자 피터 라니스는 페론주의가 모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좌파 및 사회주의 전통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페론주의를 사회주의와 분리하려는 시각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 이러한 견해를 표명한 사람이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지지와 여러 사회, 경제,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한 좌파적 제안을 포함하는 포퓰리즘적 연합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대신 페로니즘을 좌파 전통에서 완전히 떼어놓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종종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입장과 일치합니다. 차이점은 페로니즘에서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경제적 집단과 영향력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페로니즘을 진보 좌파의 대중 운동 전통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저는 페로니즘과 아르헨티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이의 격차를 부정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지만, 페로니즘을 진정한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부정하는 것은 페론의 망명부터 현재까지 모든 부문에서 벌어진 좌파 간의 위대한 아르헨티나 논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은 "페로니스트 조국"이었습니다.[122]

반페론 가정 출신인 체 게바라조차 페론주의를 "쿠바 혁명이 지지할 수 있는 토착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로 보았다.[123] 피델 카스트로는 자서전에서 페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20세기에 군인들이 행한 많은 영웅적인 혁명적 업적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도 군 출신이었습니다. (...) 페론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과두 정치 세력을 모욕하고, 그들을 굴욕시켰습니다 – 그는 그들의 극장과 부유층의 다른 상징들을 국유화했습니다 – 하지만 과두 정치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적절한 순간에 미국과의 공모와 지원을 받아 페론을 타도했습니다. 페론의 위대함은 그가 그 부유한 나라의 준비금과 자원을 이용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항상 그에게 감사하고 충성스러웠던 그 사회 계급은 페론을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124]

마오쩌둥 역시 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친페론 마오주의 민병대 방문 시 "내가 젊은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페로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125] 아르헨티나 혁명 공산당은 이를 "마오가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페로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라는 구호로 활용했다.[126] 이에 페론은 "마르크스주의는 페론주의 운동과 모순되지 않고 보완한다"고 답했으며, 1972년 연설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마오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공산주의 루마니아 방문 후에는 "그 나라의 체제가 여러 면에서 후스티시아리즘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127]

페론은 자신의 이념을 후스티시아리즘 또는 '사회주의적 국민 기독교'(기독교 국민 사회주의)로 묘사했는데, 이는 국민의 의지와 각국의 고유한 상황 및 문화를 고려하는 정부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128] 리처드 길레스피에 따르면, 이는 "특정 국가적 조건과 전통을 존중하는 경제 사회화와 대중 권력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의 '국가적' 길"을 의미한다.[129] 페론은 "국민주의는 사회주의와 반드시 대립할 필요가 없다"며, "결국 두 가지 모두 인민과 인간의 해방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국민 사회주의' 개념을 정당화했다. 1972년, 좌파 페론주의 그룹은 이를 "대중과 아르헨티나 노동 계급의 열망을 대표하고 표현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사회주의의 국가적 표현"으로 묘사했다. 이들에게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가져다주는 토착 사회주의 형태였다.[130] 1971년 7월 페론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 후스티시아리스트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입니다… 우리의 혁명적 과정은 개인적 및 집단적 [필요]를 명료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후스티시아리즘이 원하는 것과 같은 공정한 사회주의, 그리고 그것이 후스티시아리즘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공동체가 [공동체의] 내재적 조건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주의입니다.[131]

페론은 자신의 "국민 사회주의"를 "외국 제국주의의 결정적 극복"이자 "아르헨티나에서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경계"로 묘사했다. 그는 "'국민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때때로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자본의 억압을 근절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페론주의의 역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해결책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해한 페론주의적 국민 사회주의는 "사회를 인간에게, 인간을 사회에 봉사하게 하고, 도덕적, 윤리적 가치, 정직과 겸손을 기본 축으로 삼으며,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고, 은행을 국유화하며, 심오한 문화 및 농업 개혁을 통해 토지를 경작자에게 돌려주고, 외국 무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페론주의의 국민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에 예속된 사람들"의 해방과 "국민 대표"를 통한 주권 확보에 기반했으며, 제국주의를 "지배 구조 유지에 있어 자본주의의 한계"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로 보았다.[130]

대부분의 역사가는 사회주의가 페론의 정치적 영감 중 하나였다고 본다. 페데리코 핀켈슈타인은 페론의 포퓰리즘을 "국민주의와 비마르크스주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종합"으로 규정했다.[132] 아르헨티나 역사가 크리스티안 부흐루커(Cristian Buchrucker)는 페론 이념을 국민주의, 포퓰리즘, 기독교 사회주의 요소의 혼합으로 보았고, 움베르토 쿠체티는 페론주의가 "국민 사회주의, 노조주의 전통, 중간 계층의 국유화, 카리스마적 지도력, 혁명적 예언, 제3세계주의, 후스티시아리스트 윤리, 기독교적 유토피아, 대중 동원 및 민주화의 윤곽" 등 다양한 정치 개념의 집합체라고 분석했다. 부흐루커는 페론 운동이 내부의 경쟁적인 이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했지만, 노동조합과 "국가적 해방 운동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혁명적 수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133] 예르지 J. 위아트는 페론이 "강한 국민주의적 색채를 띤 사회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사상의 결합"을 견지했다고 보았다.[134] 에밀리오 오캄포(Emilio Ocampo)는 페론이 "강한 국민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요소와 수사법을 통합했다"고 주장했다.[135]

정치학자 라파엘 디 텔라는 페론주의를 정치적 가톨릭과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묘사했고,[136] 역사가 라아난 라인은 이를 가톨릭 사회 교리와 사회주의적 흐름에 의해 형성된 국민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분류했다.[137] 피터 라니스는 페론이 "페론주의를 통해 토착 사회주의와 아르헨티나 국민주의를 융합했다"고 썼으며,[138] 릴리 발로펫은 페론의 정책이 감마르 압델 나세르와 유사하게 반제국주의적 국민주의, 비동맹 '제3의 위치' 철학,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특징으로 한다고 언급했다.[139] 게리 B. 매디슨은 페론의 정책이 포퓰리즘 사회주의를 나타낸다고 보았다.[140]

미국 역사가 개럿 존 로버츠는 페론주의를 "극단적 국민주의 사회주의 노동 운동"으로 보고, 페론이 "사회주의적이고 국민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그의 5개년 계획이 요셉 스탈린 하의 소련 경제 프로그램 패턴을 따랐다고 지적했다.[141] 알베르토 스펙토로프스키(Alberto Spektorowski)는 페론이 자신의 이념을 '국민 사회주의'라고 정확히 묘사했다고 결론지으며, 페론이 "국가 전체주의, 반제국주의 및 사회 정의"를 종합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페론이 좌파 국민주의와 신디칼리즘에 영향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에서 "이념적 대립은 페론주의로 대표되는 국민주의와 구 보수 질서 사이에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운동을 형성했다고 보았다.[142]

로날도 먼크에 따르면, "많은 관찰자들은 페론 자신을 일종의 국민주의적 사회주의 지도자, 또는 아르헨티나의 레닌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페론과 페론주의 혁명 세력 간의 관계에 대해 먼크는 페론이 나중에 운동 내 좌파와 갈등을 겪은 것은 이념보다는 권력 정치에 기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몽토네로스의 순수하게 반제국주의적이고 반과두 정치적 프로그램("국민 사회주의")은 페론의 "국가 재건" 경제 프로젝트와 양립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대중 동원력은 그러했습니다."[143] 레스터 A. 소벨 역시 페론주의 좌파와의 최종 갈등이 "페론이 사회주의에 반대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비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적대감으로 인해 발생한 그의 운동 내 분열에 더 반대했다"고 주장한다.[144]

시모어 마틴 립셋은 그의 저서 ''정치적 인간: 정치의 사회적 기반''에서 "페론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처럼 주로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더 빈곤한 농촌 인구를 포함하는 하층 계급을 지향한다"고 지적하며, 페론주의를 "하층 계급에 호소하는 반자본주의적 포퓰리즘 국민주의"로 묘사했다. 그는 페론주의를 파시즘의 좌익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만약 페론주의가 파시즘의 변형이라면, 그것은 좌익 파시즘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좌절감을 해소했을 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45] 그는 페론주의를 "좌익 극단주의의 한 형태"로 분류했다.[146]

페론주의는 제3세계 사회주의의 한 형태[147] 또는 아프리카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와 유사한 포퓰리즘적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독특한 아르헨티나 형태로도 묘사되었다.[148] 독일 정치학자 리사 보게르츠는 페론주의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더 광범위한 역사적 운동"의 일부로 간주하면서도, 아르헨티나 사회당과 같은 주류 사회주의 운동과는 구별되는 운동으로 보았다.[149] 도널드 C. 호지스는 페론주의를 국민주의와 기독교 사회 교리 요소를 통합한 "특이한 사회주의 형태"로 묘사했다.[150] 찰스 D. 아메링거는 "1943년 후안 페론의 집권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 충동의 끝이 아니라 정점이었다"고 주장하며, "페론이 도입하거나 시행한 많은 사회 입법은… 사회당에서 시작되었다"고 덧붙였다.[151]

1952년 6월 두 번째 취임식에서 페론과 병상에 누워 있는 에비타. 에비타는 그 다음 달 사망했다.


일부 UCR과 사회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인기 있는 부인 에바를 러닝메이트로 세우지 못했음에도 페론은 1951년 대선에서 30% 이상의 격차로 재선되었다.[152] 이 선거는 아르헨티나 여성에게 처음으로 선거권이 부여되었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최초의 선거였다. 페론은 그해 10월 7번 채널 공영 방송을 통해 취임했다. 그러나 1952년 6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할 때는 심각한 가뭄으로 인한 5억달러의 무역 적자와 외환 보유고 감소 등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14]

페론은 사회 갈등 조정을 위해 고용주와 노조를 생산성 회의에 소집했지만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페론 지지자들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고, 대통령의 불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주지사 도밍고 메르칸테와 같은 주요 동맹의 강제 사임으로 이어졌다.[22] 다시 수세에 몰린 페론은 군 장성들의 승진을 가속화하고 급여 인상 및 기타 혜택을 확대했으며, CGT나 정부 기관을 위한 랜드마크 건설 프로젝트(예: 41층, 141m 높이의 알라스 빌딩, 후일 아르헨티나 공군에 이관됨)를 가속화했다.[153]

1952년 7월 26일 에바 페론의 사망 이후 페론에 대한 반대는 더욱 거세졌다. 1953년 4월 15일, 신원 미상의 테러 집단이 마요 광장 집회에서 폭탄 두 개를 터뜨려 7명이 사망하고 95명이 부상당했다. 혼란 속에서 페론은 군중에게 보복을 촉구했고, 군중은 사회당 본부와 귀족 조키 클럽(Jockey Club) 등 반대 세력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불태웠다.

아르헨티나에서 설계 및 제조된 후스티시아리스타는 페론의 지역 자동차 산업 개발 노력의 일환이었다.


페론과 반대 세력 간의 교착 상태 속에서도, 1952년 말 무역 적자 해결을 위한 긴축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대체로 인기를 유지했다. 1954년 3월, 고인이 된 부통령 오르텐시오 키하노를 대체하기 위한 선거에서 페론의 후보가 압승했다. 지지 기반이 공고하다고 판단한 페론은 인플레이션이 한 자릿수로 안정되고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자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건설 중인 알라스 빌딩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의 생활 수준과 산니콜라스데로스아로요스의 신규 제철소에 매력을 느낀 자동차 제조업체 피아트와 카이저 모터스, 그리고 다임러-벤츠의 트럭 부문이 코르도바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926년 제너럴 모터스 조립 라인 이후 아르헨티나에 대한 첫 주요 외국인 투자였다. 또한 페론은 1955년 5월 캘리포니아 표준유(Standard Oil of California)와 중요한 석유 탐사 계약을 체결하여, 당시 만성적인 무역 적자의 주요 원인이었던 수입 석유와 자동차를 외국인 투자를 유치한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려는 정책을 강화했다. 1951년 중도파 라디칼 시민 연합의 부통령 후보였던 아르투로 프론디지는 이를 비애국적 결정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3년 후 대통령이 되어서는 직접 외국 석유 회사들과 탐사 계약을 체결했다.

1954년 말이 되자 페론은 이혼과 매춘 합법화라는, 당시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사회에 훨씬 더 논란이 될 개혁을 발표했다. 에바 페론 재단 설립 이후 페론 정부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아르헨티나 지도부는 이제 공개적으로 페론을 "폭군"이라 부르며 적대했다. 1950년 이후 아르헨티나 언론 대부분이 정부 통제나 감시 하에 있었지만, 넬리다 리바스(Nelly Rivas)라는 미성년 소녀와의 추정 관계에 대한 선정적인 기사가 가십란을 채웠다.[163] 기자들이 그의 새로운 애인이 잡지에서 주장한 대로 13세인지 묻자, 59세의 페론은 자신이 "미신적이지 않다"[155]고 답했다. 망명 중 페론은 넬리에 대해 "내가 만난 그 젊은 여성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UES(중등학생 연합)에 다니는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아이이고, 남자로서 나는 그녀에게서 아이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거나 볼 수 없습니다. 제 나이와 경험 때문에 제가 도덕적 규범을 어기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156]라고 말했다.

넬리다 리바스와 페론의 관계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빅토리아 앨리슨은 이 이야기가 페드로 에우헤니오 아람부루 군사 정부가 페론을 중상모략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의 일부라고 보며, 유사한 혐의들도 포함되었다고 주장한다.[157] 실바나 G. 페레이라는 반페론주의자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대중은 이를 믿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수년이 지나도 대중 계층 사이에서 페론주의 정체성이 지속된 것은 이러한 규탄의 비효율성을 보여준다"고 썼다.[2] 페론 전기 작가 질 헤지스는 "이 개념은 아르헨티나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정치인들이 어린 소녀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흔했기 때문에 다른 반페론주의 주장들 사이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63] 페론은 또한 1954년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 배우들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를 받았고, 리바스가 속한 중등학생 연합(Unión de Estudiantes Secundarios, UES) 여성 회원들과 찍은 사진은 이미 그녀와의 관계가 주장되기 전에 도덕적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반페론주의 언론은 페론이 UES 여성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며 "에바 페론의 돌이킬 수 없는 부재를 잊으려 한다"고 조롱했고, 그 직후 페론과 리바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처음 등장했다.[158]

그러나 곧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한 유머를 잃었고, 최근 그의 이미지 실추 배후에 있다고 믿는 가톨릭 사제 두 명을 추방했다. 이후 1955년 6월 15일, 신성한 교황청 교황청[159](교황 비오 12세 자신이 아닌, 국가 원수 파문 권한을 가진 기관)[160]의 선언은 페론을 파문한 것으로 해석되었다.[161] 다음 날, 페론은 마요 광장에서 지지 집회를 열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하던 중 해군 전투기가 상공을 비행하며 광장에 폭탄을 투하했고, 이후 조종사들은 우루과이로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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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유산

페론의 견해와 정책을 사회주의의 변형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는 페론의 망명과 사후에 주목받았는데, 많은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이 페론이 사회주의자였는지, 사회주의 체제를 추구했는지 분석했기 때문이다.[110] 페로니즘은 다양하게 국민 사회주의,[111] 수혜적 사회주의,[112]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113] 그리고 가톨릭 사회주의의 변형으로 묘사되었다.[114]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페론이 "국유화된 산업과 사회 서비스의 대규모 공공 부문"을 갖춘 계획적이고 엄격하게 규제된 경제를 창출했으며, 이는 "재분배적 성격"을 지니고 노동자의 이익과 노동조합의 권한 부여를 우선시했다고 지적한다.[115] 페론과 사회주의 지도자 후안 호세 아레발로와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볼리비아 국민혁명에 대한 그의 광범위한 지지 역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116] 또한,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사이의 "제3의 길" 개념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페론은 쿠바 혁명,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117] 사미르 아민,[118] 호세 마리아 아리코,[119] 디터 보리스(Dieter Boris),[120] 그리고 도널드 C. 호지스[121] 와 같은 일부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은 페론의 이념을 진정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정치학자 피터 라니스는 페로니즘이 모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좌파와 사회주의 전통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페로니즘을 사회주의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러한 견해를 표명한 사람이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지지와 여러 사회, 경제,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한 좌파적 제안을 포함하는 포퓰리즘적 연합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대신 페로니즘을 좌파 전통에서 완전히 떼어놓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종종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입장과 일치합니다. 차이점은 페로니즘에서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경제적 집단과 영향력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페로니즘을 진보 좌파의 대중 운동 전통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저는 페로니즘과 아르헨티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이의 격차를 부정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지만, 페로니즘을 진정한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부정하는 것은 페론의 망명부터 현재까지 모든 부문에서 벌어진 좌파 간의 위대한 아르헨티나 논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은 '페로니스트 조국'이었습니다."[122]

반페론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는 페로니즘을 "쿠바 혁명이 편을 들 수 있는 일종의 토착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로 간주했다.[123] 페론은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지지도 받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그의 자서전 나의 삶: 구술 자서전에서 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20세기에 군인들이 행한 많은 영웅적인 혁명적 업적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도 군 출신이었습니다. (...) 페론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과두 정치 세력을 모욕하고, 그들을 굴욕시켰습니다 – 그는 그들의 극장과 부유층의 다른 상징들을 국유화했습니다 – 하지만 과두 정치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적절한 순간에 미국과의 공모와 지원을 받아 페론을 타도했습니다. 페론의 위대함은 그가 그 부유한 나라의 준비금과 자원을 이용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항상 그에게 감사하고 충성스러웠던 그 사회 계급은 페론을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124]

마오쩌둥 역시 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르헨티나의 친페론 마오주의 민병대를 방문했을 때, 마오는 "만약 내가 젊은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나는 페로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25] 이 발언은 아르헨티나 혁명 공산당에 의해 "마오가 아르헨티나인이었다면, 그는 페로니스트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구호로 활용되었다.[126] 이에 페론은 "마르크스주의는 페론주의 운동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완한다"고 화답했다. 그는 또한 1972년 11월 12일 연설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만약 그가 중국인이었다면 그는 마오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때는 "그 나라의 체제는 여러 면에서 후스티시아리즘과 유사하다"고 평가했다.[127]

페론은 자신의 이념을 후스티시아리즘 또는 ''사회주의적 국민 기독교'' - "기독교 국민 사회주의"라고 다양하게 묘사했다. 이는 페론이 각 국가의 고유한 상황과 문화를 고려하며 국민의 의지를 따르는 다양한 정부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128] 리처드 길레피에 따르면, 이 표현은 "특정 국가적 조건과 전통을 존중하는 경제 사회화와 대중 권력의 체제로 이해되는 사회주의의 '국가적' 길"을 의미하고자 했다.[129] 페론은 "국민주의는 사회주의와 반드시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국민 사회주의' 개념을 정당화했는데, 이는 "결국 두 가지 모두 적대적이기는커녕, 인민과 인간의 해방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연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72년, 좌파 페론주의 집단은 페로니즘을 "대중과 아르헨티나 노동 계급의 열망을 대표하고, 표현하고, 행동으로 발전시키는 한 사회주의의 국가적 표현"이자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부여하는 토착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묘사했다.[130] 1971년 7월, 페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후스티시아리스트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정부입니다… 우리의 혁명적 과정은 개인적 및 집단적 [필요]를 명료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후스티시아리즘이 원하는 것과 같은 공정한 사회주의, 그리고 그것이 후스티시아리즘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공동체가 [공동체의] 내재적 조건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주의입니다."[131]

페론은 자신의 "국민 사회주의"를 "외국 제국주의의 결정적 극복"과 "아르헨티나에서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경계"로 묘사했다. 그는 "때때로 매우 이상하게 들리는 그 단어, 국민 사회주의는 그 이상함을 잃고 자본의 억압을 근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미를 얻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페로니즘의 역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해하는 페로니스트 국민 사회주의는 "사회를 인간의 봉사에, 인간을 사회의 봉사에 두는 것; 도덕적, 윤리적 가치, 정직과 겸손을 이 단계의 기본 축으로 구출하는 것;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고, 은행을 국유화하고, 심오한 문화 개혁을 수행하고, 심오한 농업 혁명을 통해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외국 무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페로니즘의 국민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에 예속된 사람들"의 해방에 기초하고 페론이 관리하는 "국민 대표"를 통해 주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제국주의를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데 있어 자본주의의 한계"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의 일부로 보았다.[130]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회주의가 적어도 페론의 정치적 영감 중 하나였다고 본다. 페데리코 핀켈슈타인은 페론의 포퓰리즘을 "국민주의와 비마르크스주의 기독교 사회주의의 종합"으로 분류했다.[132] 아르헨티나 역사가 크리스티안 부흐루커는 페론의 이념을 국민주의, 포퓰리즘 및 기독교 사회주의 요소의 혼합으로 보았고, 움베르토 쿠체티는 페로니즘이 "국민 사회주의, 노조주의 전통, 중간 계층의 국유화, 카리스마적 지도력, 혁명적 예언, 제3세계주의, 후스티시아리스트 윤리, 기독교적 유토피아, 대중 동원 및 민주화의 윤곽"과 같은 정치적 개념의 집합체라고 말했다. 부흐루커는 페론의 운동이 내부의 경쟁적인 이념적 운동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상태에 있었지만, 노동조합과 "국가적 해방 운동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주장하는 혁명적 수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133] 예르지 J. 위아트는 페론이 "강한 국민주의적 색채를 띤 사회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사상의 결합"을 고수했다고 보았다.[134] 에밀리오 오캄포(Emilio Ocampo)는 페론이 "항상 강한 국민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요소와 수사법을 통합했다"고 주장했다.[135]

정치학자 라파엘 디 텔라는 페로니즘을 정치적 가톨릭과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묘사했으며,[136] 역사가 라아난 라인은 이를 가톨릭 사회 교리와 사회주의적 흐름에 의해 형성된 국민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분류했다.[137] 피터 라니스는 페론이 "페로니즘을 통해 토착 사회주의와 아르헨티나 국민주의를 융합했다"고 썼다.[138] 릴리 발로펫은 페론의 정책이 감마르 압델 나세르의 정책과 매우 유사하며, 두 정권 모두 반제국주의적 국민주의, 냉전 시대의 비동맹 '제3의 위치' 철학 및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언급했다.[139] 게리 B. 매디슨은 페론의 정책이 포퓰리즘 사회주의를 나타낸다고 말한다.[140]

미국 역사가 개럿 존 로버츠는 페로니즘을 "극단적 국민주의 사회주의 노동 운동"으로 보고, 페론이 "사회주의적이고 국민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그의 5개년 계획이 요셉 스탈린 하의 소비에트 경제 프로그램의 패턴을 따랐다고 지적했다.[141] 알베르토 스펙토로프스키(Alberto Spektorowski)는 페론이 자신의 이념을 '국민 사회주의'라고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결론지으며, 페론이 "국가 전체주의, 반제국주의 및 사회 정의"를 종합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페론이 좌파 국민주의와 신디칼리즘에 의해 형성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 "이념적 대립은 페로니즘에 의해 대표되는 국민주의와 구 보수 질서 사이에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운동을 형성했다고 언급했다.[142]

로날도 먼크에 따르면, "많은 관찰자들은 페론 자신을 일종의 국민주의적 사회주의 지도자, 아니면 아르헨티나의 레닌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는 페론이 나중에 자신의 운동의 좌파와 갈등을 빚은 것이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정치에 더 기반을 두었다고 분석했다. "몽토네로스의 순수하게 반제국주의적이고 반과두 정치적 프로그램("국민 사회주의")은 페론의 "국가 재건" 경제 프로젝트와 양립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대중 동원력은 그러했습니다."[143] 레스터 A. 소벨 또한 페로니스트 좌파와의 최종 갈등과 관련하여 "페론은 사회주의에 반대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비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적대감으로 인해 발생한 그의 운동 내 분열에 더 반대했다"고 주장한다.[144]

시모어 마틴 립셋은 그의 저서 ''정치적 인간: 정치의 사회적 기반''에서 "페로니즘은 마르크스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주로 도시 노동자이지만 더 빈곤한 농촌 인구도 포함하는 더 가난한 계층을 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페로니즘을 "하층 계급에 호소하는 반자본주의적 포퓰리즘 국민주의"로 묘사하며, 파시즘의 좌익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페로니즘이 파시즘의 변형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좌익적 파시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그들의 좌절감을 해소할 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145] 그는 페로니즘을 "좌익 극단주의의 한 형태"로 분류했다.[146]

페로니즘은 제3세계 사회주의의 한 형태,[147] 또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아랍 사회주의와 유사한 포퓰리즘적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독특한 아르헨티나식 형태로도 묘사되었다.[148] 독일 정치학자 리사 보게르츠는 페로니즘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더 광범위한 역사적 운동"의 일부로 간주하며, 아르헨티나 사회당과 같은 아르헨티나의 주류 사회주의 운동과는 다른 흐름을 나타낸다고 보았다.[149] 도널드 C. 호지스는 페로니즘을 국민주의와 기독교 사회 교리의 요소를 크게 통합한 "특이한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묘사했다.[150] 찰스 D. 아메링거는 "1943년 후안 페론의 집권은 아르헨티나의 사회주의적 충동의 끝이 아니었고, 정점이었다"고 주장하며, "페론이 도입하거나 시행한 많은 사회 입법은… 사회당에서 시작되었다"고 덧붙였다.[151]

페론 축출 후 들어선 새로운 군사 정권(후타)은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페론 부부의 사치품으로 주장되는 골동품, 보석, 자동차, 요트 등을 공개 전시했으며,[165] 페론주의와 나치즘의 연관성을 부각하고 페론이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165] 다른 페론주의 지도자들의 부패 혐의도 제기되었으나, 기소된 많은 이들 중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후타의 초대 지도자 에두아르도 로나르디는 민간 자문위원회를 임명했지만, 페론주의 청산에 대한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하다가 결국 축출되었다. 그러나 위원회의 권고 사항 대부분은 후임 대통령 하에서도 유지되었다.

로나르디를 대신한 페드로 아람부루 중장은 법령 4161/56에 따라 후안 페론이나 에바 페론의 이름을 공공장소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페론주의 상징물 전시가 금지되는 등 과도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페론주의자들과 군대 내 온건파들은 1956년 6월 아람부루에 대한 반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아람부루는 이를 진압하고 주동자 후안 호세 발레 장군을 포함한 26명을 처형했다. 아람부루는 페론 부부 자체를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도 했다. 에바 페론의 시신은 CGT 본부의 전시장에서 옮겨져 이탈리아 밀라노의 소박한 무덤에 다른 이름으로 묻혔다. 당시 카라카스(베네수엘라)에서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대통령의 호의로 거주하던 페론 자신은 아람부루가 지시한 여러 차례의 납치 및 암살 시도를 피해야 했다.[166]

후스티시아리스타당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8년 선거를 앞두고 페론은 지지자들에게 급진 시민 연합(UCR) 내 온건파 후보인 아르투로 프론디지에게 투표할 것을 지시했다. 프론디지는 페론 반대 성향이 강했던 UCR 지도자 리카르도 발빈을 누르고 승리했다. 1962년 선거에서는 페론이 지지한 "인민연합"(UP) 후보 안드레스 프라미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주지사에 당선되자 군부는 프론디지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했다. 새로운 연합을 형성하지 못한 페론은 1963년 선거에서 추종자들에게 무효표를 던지도록 지시했고, 이는 유권자 5분의 1에 대한 그의 통제력을 보여주었다.[38]

1958년 베네수엘라의 페레스 히메네스 장군이 축출되면서 페론의 베네수엘라 체류는 끝났다. 파나마에서 그는 나이트클럽 가수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이사벨"로 알려짐)를 만났다.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보호 아래 스페인 마드리드에 정착하여 1961년 이사벨과 결혼했고, 1963년 가톨릭교회에 복귀했다.[167][168] 1964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1965년 아내 이사벨을 아르헨티나로 보내 정치 반체제 인사들을 만나고 페론의 대결 및 선거 보이콧 정책을 추진하게 했다. 그녀는 페론의 대표이자 CGTA(대표 노조 CGT의 분파)와 같은 여러 좌익 페론주의 운동의 후원자인 베르나르도 알베르테의 집에서 회의를 조직했다. 이 방문 중 고문 라울 라스티리는 그녀를 장인인 호세 로페스 레가에게 소개했다. 오컬트에 관심이 있던 경찰 출신 로페스 레가는 1960년대 페론주의 운동의 주요 재정 후원자였던 실업가 호르헤 안토니오에 대한 공통된 반감을 통해 이사벨의 신뢰를 얻었다.[169] 로페스 레가는 이사벨과 함께 스페인으로 가서 페론 부부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1965년 인민연합(UP)의 복귀와 그해 의회 선거에서의 승리는 온건파 대통령 아르투로 일리아의 타도와 독재의 귀환으로 이어졌다.[38]

페론은 점차 CGT 자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사무총장 호세 알론소의 지지를 받았지만, 철강 및 금속 노조 위원장 아우구스토 반도르와 같은 다른 노조 지도자들은 망명 중인 지도자와 거리를 두려 했다. 반도르는 1965년부터 1968년까지 페론의 선거 보이콧 호소에 반항하며(이는 1965년 선거에서 UP의 승리로 이어졌다) "페론 없는 페론주의"와 "페론을 구하려면 페론에 반대해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페론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 독재 정권의 지속적인 노동 탄압은 반도르와 페론의 화해로 이어졌으나, 1969년 반도르가 암살되면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특히 CGTA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독재에 대한 반대를 조직했으며, 1969년 5월-6월 코르도바소(Cordobazo) 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8]

페론은 온가니아 독재 시대에 극좌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의 저서 ''La Hora de los Pueblos''(1968)에서 페론은 새로운 삼대륙주의(Tricontinental) 정치 비전의 주요 원칙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마오쩌둥은 아시아를,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프리카를, 샤를 드골은 구유럽을, 피델 카스트로는 라틴 아메리카를 이끌고 있다."[170] 그는 더욱 과격한 노조들을 지지했고 극좌 가톨릭 페론주의 단체인 몬토네로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0년 6월 1일, 몬토네로스는 1956년 6월 후타에 대한 페론주의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페론 반대파 전직 대통령 페드로 에우헤니오 아람부루를 납치하여 살해했다. 1971년, 페론은 영화 감독 옥타비오 게티노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 페르난도 솔라나스, 헤라르도 바예호와 함께 그룹 시네 리베라시온에서 한 작업과 다큐멘터리 영화 ''La Revolución Justicialista'' 및 ''Actualización política y doctrinaria'' 제작에 대해 축하했다.[171]

동시에 페론은 극우 보수파와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UCR 내부 경쟁에서 자신의 전 수감자였던 UCR 보수파 지도자 리카르도 발빈을 지지했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게릴라 단체로 여겨지는 우익 타쿠아라 민족주의 운동의 구성원들도 그에게 합류했다. 1960년대 초에 설립된 타쿠아라스는 프리모 데 리베라의 파랑주의를 모델로 한 파시스트, 반유대주의적 단체였으며 처음에는 페론주의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세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페론주의 동맹에 가장 반대하는 그룹은 가톨릭 사제 훌리오 메인비엘레가 이끌었고, 다르도 카보가 이끄는 신아르헨티나 운동(MNA)은 1956년 발레 장군의 페론주의 봉기를 기념하며 페론주의에 접근했다. 조 벡스터와 호세 루이스 넬이 결성한 혁명적 민족주의 타쿠아라 운동(MNRT)은 민족주의를 유지하면서 페론주의에 합류하고 점차 마르크스주의화되어 몬토네로스와 ERP의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28]

1970년 6월 온가니아가 교체된 후, 로베르토 레빙스톤 장군은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정당을 소수로 통합하여 군사 정권의 통치를 연장하려 했다. 이는 페론주의자들과 그들의 반대파를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 11월 11일, 이들은 ''라 오라 델 푸에블로''(국민의 시간)라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자유롭고 즉각적인 민주 선거를 요구했다. 이 선언에는 급진 시민 연합(UCRP), 후스티시아리스타당, 아르헨티나 사회당(PSA), 민주진보당(PCP), 그리고 ''파르티도 블로키스타''(PB)가 참여했다.[38]

야당의 선거 요구는 19

참조

[1] 논문 White Evil: Peronist Argentina in the US Popular Imagination Since 1955 Mid-America American Studies Association
[2] 논문 "Perón Pedófilo": usos políticos del pasado en Twitter Facultad de Humanidades y Artes (Universidad Nacional de Rosario)
[3] 사전 Perón 2019-05-19
[4] 웹사이트 Perón, Juan Domingo https://en.oxforddic[...] Oxford University Press 2022-09-00
[5] 사전 Perón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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